와인과 사진이야기

토목기술사인 사진작가 다람이 인생3막에 농부가 되어 직접생산한 포도로 정성드려 빚은 열정과 낭만의 와인 그리고 사진이야기

Achimmaru winery

Portfolio of my life/산행일기______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남한산성

daram93 2006. 9. 26. 11:02

고단한 역사를 지닌 남한산성

 

"남한산성", 상당히 익숙한 지명이며 잘 알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장소이다. 오래 전부터  남한산성을 한번 둘러 보아야 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

에 항상 후순위로 밀려 왔던 것 같다.

 

어느날 주말 등산을 생각하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민족자존의 남한산성"이라는 카피를 보고 불현

듯 남한산성이 보고 싶어 졌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짙

게 풍기어 기대와 호기심으로 남한산성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던 거다. 

 

2006년9월24일 일요일 필자는 네비게이션에 '남한산성입구'라고 입력하고는 기계가 길을 안내하는 곳으

로 아무 생각없이 달려 왔더니 은행동 산성유원지가 나왔다. 이 곳에서 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 했다.  

 

나중에 안 일지만 남한산성은 둘러보려면 이 곳으로 올 것이 아니고 남문터널을 지나서 산성안에 "산성

로타리" 가 있는데 이 지점에서 남문으로 오르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유원지 입구를 지나 남문을 향해서 오르는 길은 평탄하고 가벼운 운동시설과 벤치들이 아기자기하게

설치되어 있다. 중간중간에 약수터도 있고 작은 사찰이 있어서 운치를 더 해 주는 것 같았으며 계곡에는

졸졸 흐르는 물과 예쁜 나무다리들이 공원의 정겨운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다.

 

공원을 조금 오르니 탑공원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주변의 흩어진 돌들을 모아다가 탑모양으로 쌓아

놓은 거다. 절묘하게 쌓아 놓은 가지각색의 돌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아져 있다. 세찬 바람이 불면 금방이

라도 무너 질 것만 같다.    

 

 

 

좌측 사진의 탑들은 탑공원이라는 이정표 옆에 쌓아진 돌탑이고 뒷편 허름한 간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이 돌탑을 쌓은 사람이 쓴 글이다.

 

                       - 우리의 만남 -

     나는 내 멋대로 아무 쓸모 없이 뒹굴던 돌 이였고

     너는 비바람 속에서 썩어 버려진 나무뿌리였지

     어느날 이름 모를 사람과 우연히 인연이 되어서

     너와 내가 만나 하나가 되어 소중한 작품이 되어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구나

     우리네 인생도 너희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  자연과 그리고 너희들과 우리 인간이 만나서

     내일에 꿈과 희망의 보람찬 21세기를 맞자구나.

                            - 1998. 7       글쓴이 김재선 -     

 

우측의 사진은 조금 더 오르면 '통일기원탑'이라는 안내간판과 함께 세워져 있는 돌탑이다. 이 통일의 탑

은 통일을 염원하며 김재선씨가 쌓아 놓았다는 안내 간판이 있다.  

 

 

돌탑을 지나서 한참을 오르면 약수터가 2~3개 있고 능선으로 올라서면 남문이다. 이 남문에서 입장표

를 판매하고 있으나 표를 검사하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물론 표를 사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표를

산 필자는 나중에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1인당 1,000원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산성이라고 한다. 산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

의 접근이 어려우나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풍부한 수량을 갖추어 농사도 지을 수 있는 천혜의 전

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왕도였다는 견해도 있으나 최근 발굴조사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672년에 쌓은 주장

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산성은 천년이 넘는 우리 역사의 수난을 함께 해온 숨결이 묻어 있다.   백제시대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 곳에 도읍을 정했다고도 하며, 후삼국시대에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한강유역을 방어

하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성에서 몽고군의 침략을 방어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이 있었으며, 그 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봉기한 경기의병의 거점이었으며, 일제 강점시대인 1919년3월

27일 새벽에 횃불을 들고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3.1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또 당시 사회

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단체'가 결성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는 포탄이 성벽에 떨어져 성벽이 크게 훼손되기도 하였다고 전하며 이후 이승만대통령, 박

정희대통령의 관심으로 오늘 날의 남한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국난의 역경을 지켜 보아온 산성은 그 상처만큼이나 깊은 민족자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남문에서 북문쪽으로 길을 잡았다. 산성을 따라 평탄한 길과 얕은 언덕을 오르면 뱀처럼 굽

이치는 산성의 모습이 소나무 숲과 어울려 아름답기 그지 없다. 외람되지만 전쟁의 상흔은 보이지 않으

니 .......  선조들이 들으면 진노 하겠다.  

 

 

 

위 좌측의 사진은 영춘정이며 남문 아래에 있던 것을 옴겨 왔으며 서울,경기지방을 관망할 수 있다.

우측의 사진은 젊은 연인들이 한가로이 경치를 즐기는 풍경이다.

 

 

 

위 사진은 암문의 성 안밖에서 본 모습이다. 암문은 비밀통로를 말하는 것으로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식량

이나 병기를 나르고 때로는 구원 연락병을 내 보내는 통로로 이용된다고 한다. 유사시에는 흙으로 옹벽

을 쌓아 두었다가 무너트려 암문을 폐쇄한다고 한다.

 

 

위 사진은 "수어장대"이고 청량상 정상에 세워져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남한산성에는 총 3개의 장대가 있는데 모두 소실

되고 수어장대만 유일하게 현존한다고 한다.

 

장수가 지휘하던 누각에 걸맞게 그 위용이 있으며 웅장한 모습이다.   

 

 

 

수어장대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이 화려하다. 사람들이 산성지도를 열심히 들여다 보며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다. 오른쪽 사진의 나무는 향나무이며 수령이 360년이나 된다.  

 

 

 

위 좌측사진의 표석은 "탁지부측량소삼각점"이라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에 탁지부에서 설치한 구삼

각점 표석이다. 수어장대 뒷편에 있으며 당시에 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건물 터 같은데 무슨 건물인지 안내판을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위치로 보아서 중요한 건

물이 있었던 같다.

 

 

 

 

 

위 좌측사진은 무망루이며, 조선 영조 27년에 증축된 문루로써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無忘樓"라고 이름 지었다고 표석에 쓰여 있다. 수어장대 오른편에 세워졌다.

 

수어장대 옆에는 "리대통령각하행차기념식수"라는 표석이 있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을 말하는 것

같다.

 

 

 

위 좌측의 사진은 "매바위"이다. 수어장대 앞마당 모퉁이에 있는 이 매바위에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장군은 완벽한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완성 기한을 넘기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까지 부족하게 되자 이회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아 결국

참수형에 처해 졌다고 한다.

 

그런데,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기 직전 "내가 죽은 뒤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로 이회장군의 목을 베자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 나와

근처 바위에 앉았다가 날아 갔는데 그 자리에 선명한 매 발톱자국이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이 기적 같은 일이 이회장군의 억울함을 밝혀 주었던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한이 서렸으면 기적이

일어 났겠는가?  매바위에 서린 장군의 혼령 앞에 서니, 남을 비방하거나 무고하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놈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매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위 우측사진은 병암이다. 정조 때에 산성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이 곳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 하였으

므로 당시 부윤이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기록하였으며 이글을 지은 이는 서명응이다라고 표석에 쓰여

있다.  

 

 

 

위 사진은 서문이다. 서문 내외부에서 촬영한 사진이며,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성벽이 견고하게 설치

되어 있어 감히 넘보기 어려울 것 같다.

 

 

 

연주봉 옹성으로 가려면 서문을 나와 성외벽 길을 따라 가야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가 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강 남북의 전경이 장관이다. 북으로는 하남시가 내려다 보이고 멀

리 구리시까지 보인다.  스모그로 인해 서울은 언제나 뿌였다.

 

 

 

위 좌측에 사진은 매탄처이다. 병자년 추위 속에서 혹독한 전쟁을 치른 후 유사시에 쓰기 위하여 숯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이 산성 안에 94개소가 있으며 그 기록이 소상히 전해져 온다고 한다. 

 

위 우측사진은 "치"라는 것이다.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성벽을 쌓는 일도 전술과 연계됨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은 연주봉 옹성이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쌓은 이중성

벽을 말한다.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여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것이다.

 

연주봉 옹성은 북방향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적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는 중요한 요지로 보인다.

 

 

 

서문을 지나서 북문으로 가는 길에 국청사라는 사찰이 있다. 규모는 작고 1625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정원석 사이사이에 애기불상과 목각불상이 모셔져 있다. 산성내 사찰 주변과 돌탑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런 불상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신도들이 하나씩 모셔 놓은 것 같다.

 

오늘은 사찰아래에서 불우이웃돕기 일일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출출하여 막걸리 한잔을 쭈~욱

들이키고는 북문을 향해 걸어 갔다.

 

 

 

산성내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솔향의 내음이 은은하게 퍼져 산림욕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

인다. 사람이 너무 많아 그게 흠이다.

 

 

 

오랜 세월 인고를 견디지 못하고 성벽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려 한쪽에서는 계속 보수공사를하고 있다.

 

 

 

위 좌측사진은 군포지가 있던 자리에 철책을 설치 해 놓았다.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남한산성에는 125개의 군포가 있었으나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군포 터를 지나자 세련되게 쌓아 놓은 돌탑이 있다.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돌들이 마치 짜 맞추어 놓은 것

같고 선(線)의 부드러움이 예사롭지 않다. 장인의 솜씨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위 좌측사진의 철책이 쳐진 부분은 "군포지"이고 우측사진은 "수구"이다. 수구는 배수로를 말하는 것으로

성내의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시설이며 집수시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존을 위하여 묻어 두었다고

안내 간판에 적혀 있다.

 

 

 

북문을 지나서 동장대터에서 암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왔다. 북동쪽으로 숲속 길을 10여분 걸으면 벌

봉이 있다. 이 벌봉은 큰 바위가 모여 있는 봉우리로 그 모양이 멀리서 보면 벌과 같다하여 벌봉이라고

한다.

 

이 벌봉에는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하여 무속 신앙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장소이며 곳곳에 촛불

을 밝혀서 주변 바위가 검게 그을린 곳이 많다.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필자가 도착 전에 누군가가

치성을 드리고 방금 떠난 것 같다. 그런데, 젯상을 살펴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막걸리, 족발, 팩소

주, 오리온 비스켓으로 제물을 올렸다. 족발까지는 이해가 되나 비스켓 이라니 ................^^

 

이 벌봉에는 치욕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온다.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공략하면 임금이 남한산성으

로 피난 할 것을 알고 남한산성에 대한 지형지도를 그려 오게 했다.  남한산성의 지도를 받아 천문을 

읽으니 벌봉을 밖에 두고 성을 쌓아 벌봉의 기운을 제거하고 산성을 공략하면 승리할 것이라 장담하

였다고 한다.

 

마침내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였고 태종의 예상대로 조선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 들었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후로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던 것이다.  후일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

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전해져 온다.

 

 

 

벌봉을 돌아보고 산을 내려오기 위해 산성로타리로 길을 잡았다. 사실 오늘 계획은 산성을 한바퀴 돌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어 서문, 북문쪽만 돌아보고 다음에 동문 방향으로 돌기

로 하고 산을 내려 왔다.  

 

위 사진의 사당은 현절사이다. 이 사당 입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있다.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그 후 숙종 25년에 삼학사와 함께 항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남한산성 내에서는 청나라

     군대와 화의를 하느냐 끝까지 싸우느냐 하는 문제로 조선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달랐다.

     결국, 화의를 결정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는데, 청나라는 끝까지 전쟁을 주장한

     조선의 대신들을 포로로 잡아 청나라로 데려 갔다.

 

     삼학사는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대신들 중 끝까지 청나라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참형

     을 당한 사람들이다.  

 

오른쪽 사진은 산성로타리에서 남문으로 올라서는 길 옆에 비석길에 세워진 비석들이다. 누구의 비석들

인지는 모르겠다. 산성의 험난한 역사를 미루어 짐작할 때 틀림없이 뜻이 있는 사람들의 비석일 것 같다.

 

 

 

현절사를 내려서니 산성관리사무소가 있고 옆에는 산성박물관도 있었다. 시간에 쫒겨 산성박물관은 들

어가 보지는 못했다.

 

위 좌측사진의 건물은 "지수당"이다. 지수당은 조선 현종 1672년에 쌍백당 이세화가 세운 누각 건물이다.

이 건물의 앞뒤로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두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고 연못 가운데 관어정이라는 정

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다고 안내판에 소상히 적혀 있다. 

 

오른쪽 건물은 연무관이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1624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무관 앞에는 수령이 410년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가지도 무성하고 아직 건실

해 보이는 이 나무는 수백년간 남한산성의 고단한 역사를  지켜 보아 온 산 증인이다.

 

다시 남문을 지나 산성유원지로 내려 오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 작은 야외 무대에서는

초등학생들의 밴드연주가 열리고 있었다. 연주하는 솜씨가 아직 어색하지만 상당한 수준이다. 드럼을

치는 소녀의 손놀림, 기타를 치는 진지한 모습이 정겨운 공원의 풍경이다.

 

   

 

가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분홍빛 코스모스와 성급하게 물들어버린 단풍을 뒤로하며 남한산성을

떠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