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악산 만추의 산행 (등반일 2005.11.19)
가평이라는 지명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많이 알려 졌기 때문에 고향이 가평이라고 하면 "아~, 거기 좋은 동네~~"라고 바로 화답한다. 북한강 줄기를 따라 가면 산과 물이 잘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계절마다 아주 다른 풍경을 볼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여름에는 강과 계곡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혼잡하기도 하다. 또 최근에는 "겨울연가"로 대박을 터뜨린 남이섬이 있어 더욱 유명세를 탄 것이다.
남자들은 이곳에서 군생활을 지낸 사람들이 있어 살다보면 길에서 가끔씩 마주치기도 한다. 몇년 전에 경남 통영에서 일 때문에 만난 사람이 가평서 군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야수교"에서 운전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는지. 가평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눈다고 했다. 30년 전에 악명 높은 야수교에서 군생활을 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가평은 그래서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후자의 나쁜 기억은 추억속에 묻어 버리고 경치 좋은 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가평에는 유명한 산들이 많다.
운악산,유명산,연인산,명지산,호명산,축령산 ... 등등
그 중에서도 난 운악산이 좋다. 운악산은 산세가 험하고 높아서 '구름도 울고간다'는 말에서 운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속설이 있다. 운악산은 해발 935m이고 구름을 뚫은 봉과같이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계절따라 변화되는 그 비경이 너무나 아름다운 산이다. 그래서, 가평8경 중의 6경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얼마전에 운악산 단풍축제가 있었는데 올해는 단풍이 고와서 장관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 명성산을 오르느라 그 절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늦은 감이 있지만 운악산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이미 단풍은 다 지고 낙엽만이 쌓여 있어 겨울의 문턱에 선 늦은 가을이 나름대로 정취가 있었다.
자~~ 이제 산을 올라보자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악산 망경봉을 바라보며 사진 하나 찍었다. 운악산은 화악산, 관악산, 감악산, 송악산과 함께 경기 5악으로 불리는 오악 중 가장 수려한 산으로 현등산이라고도 불리운다
매표소를 지나면 커다란 문이 있는데 운악산 현등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아직 채색이 안되어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아 보기가 민망하다. 하지만 전통 건축기법으로 세워진 것이 매우 섬세함을 알수 있다.
초문을 지나자 나뭇가지에 산악회 리본이 많이 걸려 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보니 어둑어둑한 곳에 울긋불긋 나붓끼는 것이 무당집 같다.
산 입구에서 현등사까지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은 이정표가 하나씩 있는데 등산코스를 잘 잡아서 이정표를 보고 길을 잡아야 한다. 길이 순탄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올라가면 현등사로 바로 올라가게 된다. 물론, 바로가도 된다. 하지만, 오르는 길은 쉽고 내려오는 길은 험하다. 산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험한길을 택해 올라가고 쉬운길로 내려온다는 것도 알아 두자.
- 제 1코스 : 하판리 - 조계폭포 - 현등사 - 흑각대 - 정상 - 현등사 -하판리(3시간)
- 제 2코스 : 하판리 - 현등사 - 절고개 - 정상 - 무지개폭포 - 운주사(4시간40분)
- 제 3코스 : 석거리주차장 - 현등사 - 930봉 - 능선안부 - 길윤목장(3시간10분)
평탄한 길을 따라 한 20분 정도 오르니 경사가 급한 바위가 있는데 민영환 바위라고 한다. 바위에 한자로 閔泳煥 이라고 새겨져 있어 민영환 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는 사연이 있다고 하니 어디 한번 들어 보자
구한말 궁내부대신이었던 민영환 선생이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걱정하던 곳으로 1906년 나세환 외 12인의 의지로 이 바위에 "閔泳換"이라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로 민영환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바위 주변 형상은 강류를 기울여 놓은 듯 유유히 흐르는 큰폭으로 30~40도 기울어진 바위를 타고 흘러 그 밑에 심연을 이루니 폭(瀑)과 호(湖)를 겸한 폭포라 하였다고 한다.
민영환 바위를 지나서 조금 더 오르면 사찰이 있는데 현등사이다. 4월 중순경 현등사 경내에는 자목련이 만개하였을 때에는 또다른 일면을 찾아볼 수 있고, 5월경 진달래와 산목련이 계곡과 바위마다 수놓은 꽃길은 정말로 아름답다.
현등사는 신라시대 법흥왕때 창건한 절이라한다. 천년의 세월속에 정적이 감도는 사찰을 둘러 보았다. 사진은 대웅전 뒷 편에 있는 극락전의 모습이다. 사진을 잘 살펴보면 지붕 마루에 원형 표시가 보일 것이다. 원형안에 있는 기와가 초록빛을 띄우고 있는데 이것이 "청기와"다.
청기와는 옛날 한식기와로써 단 한장 밖에 없었다. 청기와를 굽는 비법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아 전부 없어지고 마지막 한장 남아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기와에 청색을 내려면 옛날에는 물감이 없어서 나뭇잎, 꽃잎 등에서 색상을 내어 구워야 했는데 굽고나면 색은 천연 재료라 다 타 버려서 색을 낼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청기와 굽는 법을 알아냈으나 이익을 혼자 차지할 생각으로 아무에게도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후세에까지 그 비법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청기와 장수"라는 말이 있는데 "저만 알고 남에게는 알리지 않아 어떤 일을 자기 혼자서 차지하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현등사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석탑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 높직한 지대석 상면에 2층 기단을 구비한 3.7m 규모의 일반형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불상의 대좌와 같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대석에는 판내에 장식문이 있는 연화문과 장방형의 액이 공통적으로 조식되어 있으며, 중대석에는 대나무형의 원주로 된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었는데, 기둥 사이에는 장방형의 액을 모각하고 상면에는 복연이 조각된 갑석을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탑신의 각면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1,2층은 4단, 3층은 3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상륜부는 복발,연주문,보륜,보주등이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탑에서는 조선 세조15년(1470)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용기가 발견된바 있다. 석탑을 구성하는 각 부의 양식과 문양등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경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전된다.]
석탑 전면에 아기불상이 참선하고 있다.
사리탑 두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오래된 사찰임을 증명하고 있는것 같다. 어느분인지는 몰라도 훌륭한 스님이었을 것 같다. 설명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좌측의 사진은 이번 산행(11월)에서 찍은 것이고 우측의 사진은 10월 운악산 축제때 찍은 병풍바위의 모습이다. 하늘의 푸른색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이 한폭의 한수화 같다. 한달 사이지만 그 비경과 느낌은 사뭇 다르다. 경기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운다.
산 정상 가까이 가면 미륵바위가 보인다. 바위의 기이한 모습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져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가히 절경이다.
산 정상은 망경대라한다. 최정상인 망경대에 올라 사면을 둘려보면 남으로는 멀리 능선 좌측으로 현리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뒤쪽으로는 포천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으로는 멀리 명지산과 화악산이 시야에 아물거리기도 한다. 망경대가 사실은 정상이 아니고 서북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는데 이곳에서 50여미터 들어가면 정상표시가 있다.
그리고, 운악산은 암벽코스와 평탄한 등산로를 함께 지녀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산행 묘미를 즐길 수 있다. 산 전체가 바위산이라 길이 아닌 곳은 다른 산에 비해 위험하다. 현등사 위의 철사다리가 설치된 부근이나 정상의 서쪽아래 100m 폭포 쪽은 간혹 사고가 발생하기도하니 주의하여야 한다.
망경대를 돌아서 10여분쯤 서쪽으로 내려오면 남근바위가 보인다. 남근바위는 망경대 좌우측으로 뻗어 있는 능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멀리서 유심히 보면 가랭이 사이에 꼿꼿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기하게도 많이 닮았다.
자식이 없는 사람은 소원을 빌어 보면 혹시 소원성취 할수 있을래나......
" 그 녀석.. 물건 한번 실하구만...!! "
폭포 이름을 잘 모르겠다. 겨울이되면 폭포가 빙벽이 되어 빙벽등반하는 사람이 있다.
운악산 계곡에는 폭포가 많아 여름철 산행에는 그만이다. 폭포 이름을 잘 기억할 수 없지만 조계폭포, 무지개폭포, 무운폭포,백년폭포 건폭포 등이 있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 봄이면 산목련과 진달래가 꽃바다를 이루기도 하여 사시사철 계곡과 수림의 정취를 맛 볼수 있다.
운악산의 진달래는 정상부의 서쪽, 동쪽, 남쪽 사면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현등사에서 능선을 타고 운악산 정상에 이르는 철사다리 코스에도 능선 좌우로 진달래가 많다. 봄 산행도 좋다.
무우폭포다. 무우폭포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옛날 중국의 시인 묵객(墨客)이 금강산 구경을 평생소원으로 여기고 조선에 와 금강을 찾아 가던 도중 이 무우폭포를 구경하고는 기간금강이니 돌아 갈 수 밖에 없다고 하며 돌아 갔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흙 한점 없는 바위에 소나무가 생명을 의지하고 산다. 생명의 존엄함을 보는 것 같다. 요즈음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는 세태에 소나무는 말없는 웅변을 전하는 것 같다.
바위 사이에 모진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때 마다 이 사진을 들여다 보라. 용기를 얻을 것이다.
산 정상 부근에는 이런 나무가 많이 보인다. 벼락을 맞아서 까맣게 그을려 있다.
이것도 벼락을 맞아 죽어 있는 나무이다. "운악"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운악산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은데 사진에서 처럼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어린시절에 들은 이야기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놈들이 전쟁물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송진을 채취해 갔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최근에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 했던 부위에 치료를 해 주었다.
매표소을 지나면 우측에 삼충단이 있다.
삼충단은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선생 세분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서기 1905년 일제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했으며 국권마저 침탈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당시 조병세 선생은 의정대신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이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처단하고 하루속히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 하였으나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최익현 선생은 을미의병운동의 태두이었는데 소위 오조약의 체결을 보고 통분하여 다시 의병을 봉기 하였고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구금 되었으나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한 충신이다.
민영환 선생은 시종무관 이었는데 을사조약을 보고 대한문 앞에 나가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국민과 각국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이 삼충단은 일제치하이던 1910년에 설단 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하고 매년 11월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과연 가평은 충신의 고장이다.
산 아래에 자리한 작은 주막에는 막걸리와 손두부, 도토리묵, 산다래, 산더덕 등 푸짐한 산채요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동네 인심도 좋다. 산에 오르기 전에 식당 앞을 지나려니 할머니가 불러서 도토리전 한조각과 막걸리 한잔을 주어서 마시고 올라 갔다.
하산하는 길에 식당에 들려서 도토리전에 막걸리를 마셨는데 그 맛이 꿀맛이었다. 사진은 식당 벽에 걸려 있는 광고지 인데 "벌떡주"라고 해 너무 웃겨서 찍어 왔다.
일행이 말하기를 "저거 먹으면 정말 벌떡 설까...? 그러면, 당신한테 꼭 필요한 술이군...!" 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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