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톤레삽 호수(Tonle Sap Lake, The Great Lake)
오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톤레삽 호수로 향했다. 톤레삽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여서
덜컹대며 달려 갔다. 호수에 가까워 지자 길 양 옆으로 수상가옥과 주민들의 가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가옥이라고 하기엔 언어가 절적하지 않았다. 차라리 오두막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톤레삽 호수는 캄보디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경이물 중에 하나라고 한다.
호수의 길이는 160Km이고 너비가 36km에 이른다. 건기에는 3,000km2 의 면적에 수심 1m 정도를
유지하고 우기에는 10,000km2 면적에 12m 수심이 된다.
톤레삽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 어류가 있고 주민은 어업을 생업으로 한다. 건기와 우기가 있어 건기에는
물이 빠져 나가 늪지를 형성하게 되고 우기에는 물이 들어와 호수가 된다. 이러한 생태적 환경은 물새나
수생동물, 양서류가 살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위 사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생식물(물망초와 비슷 함)이 호수를 뒤 덮고 있는 풍경이며 아이들이
수초를 헤치고 고기를 잡고 있다.
톤레삽 호수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수평선이 보여 바다와 같다. 물은 황톳 빛을 띠고 고기 잡는
카누만 왔다갔다 한다.
이 곳은 2,000여 가구가 산다고 한다. 그 중에 절반은 베트남인이다. 베트남 전쟁 때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은 주로 수상가옥에 살며 톤레삽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 하는데, 이 곳에 캄보디아인 보다 잘산다고 한다.
사진들은 톤레삽 선착장 주변 가옥들의 한가로운 풍경이다. 집안을 살짝 들여다 보았더니 ...........
충격이었다. 사람이 사는 생활 공간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들의 살림은 밥그릇 몇 개와 너절한
살림 몇가지가 전부였다. 어떤 집은 TV가 있었고 카세트라디오도 있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자동
차용 배터리를 집집마다 사용하는 것이 이들의 문화적 삶의 전부 였다.
이 들은 그냥 빈민이 아니라 극빈층이었다. 아이들은 고무다라 같은 것을 타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고
우리 일행이 지나가자 천진하게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현 했다. 어떤 아이는 배에 가까이 다가와
손을 펴고 "원달러"라고 반복해서 구걸을 했다. 그 아이의 눈 망울은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수상 가옥들의 풍경이다. 이 들은 고기를 잡기도 하지만, 악어, 오리등 양식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쪽배에 여러가지 생필품을 싣고 팔러 다니는 주민도 보인다. 수상 슈퍼마켓인 셈이다.
오늘은 시장이 열린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큰 흥정이 있는 것 같다.
이 곳에서도 삶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캄보디아의 아이들
관광지로 들어서면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따라 붙는다. "천원에 다섯개"라고 한국말을 하면서 끈질
기게 따라 오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사모님 사랑해요!"라고 외치면서 물건을 사라고 한다. 한국의
사모님은 평소에 잘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 사랑한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여 천원어치 사게 된다. 이
들은 잘 교육된 훌륭한 상인이었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이 들은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한국 말을 잘 못 배운 아이(청색 셔츠를 입은 남자 아이)가 "할머니 사랑해요!!??"하는 바람에
우리 일행은 배꼽을 잡고 까무러지게 웃었다. 그래도 그런 언행이 넘 귀여웠다. 물론 안 샀지!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표정이 없다. 카메라을 들이 밀어서 굳은 표정이지만 평소에도
아이들의 표정이 없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는 크고 눈은 쑥 들어가 깊은 애수가 있어 보인다.
유적지 여기저기서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아이들은 내 몰렸지만 이 들의 수입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아이들 끼리 놀이를 할 때면 우리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 킬링필드
1976년 캄보디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에서 폴 포트 총리는 1960년 자신이 주도해 만든 ‘캄보
디아 노동당’ 창설일을 당(黨)의 생일로 삼자고 했다. 당 간부 케오 미아스와 논 수온은 1951년
결성됐던 ‘크메르 인민혁명당’ 창설일로 맞섰다.
폴 포트는 두 정적(政敵)을 배반죄로 처형하곤 ‘악덕 세균 색출’을 내세워 숙청에 들어갔다.
2000년 불교왕국 캄보디아는 3년 동안 죽음의 땅 ‘킬링 필드(Killing Field)’가 됐다.
‘브러더 넘버 원’(인민의 맏형) 폴 포트는 ‘넘버 투’ 누온 체아 당 부서기장과 ‘넘버 스리’ 이엥
사리 외무장관을 앞장세웠다. 이들은 앞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와 군인, 당내 반대파, 교수·
교사·의사·약사·예술인을 ‘세균’으로 점찍었다. 영어를 하고 안경을 쓴 대졸자, 얼굴과 손이
하얗고 부드러운 사람, 외국 책을 갖고 있는 사람, 피아노나 기타를 치는 사람, 뚱뚱한 사람을
부르주아로 몰아 죽였다.
‘투올 슬렝’이라는 형무소 겸 처형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전기고문을 받고 다른 ‘세균’을 3명
씩 적어내야 했다. 부모 자식 형제가 보는 앞에서 그들의 자식 부모 형제가 죽어갔다. 처형자들
은 “총알이 아깝다”며 개머리판과 몽둥이, 곡괭이를 썼다. 시체는 과수원의 가로·세로 3m, 높
이 1.5m 구덩이 200여 개에 파묻었다. 죽음의 들판 ‘킬링 필드’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전국에서
100만명이나 되었다.
이 사실은 미확인 정보였으나 영화 "킬링필드"의 실존인물이 캄보디아를 탈출하여 전세계에 폭로
함으로써 대학살 킬링필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탈출하다가 벌판에서
넘어지는데 그 장면에서 왜 킬링필드인지 알게된다. 주인공이 고개를 드는 순간 온통 벌판이 시체로
덮여 있으며, 시체가 썩어 해골이 널려있다. 죽음의 벌판,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이 곳은 킬링필드의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실제 유해를 수거하여 탑을 세우고 폴포트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영문으로 쓰여진 글은 탑 옆에 세워져 있으며, 내용은 이 사리탑의 뼈들은 들판에서 수집해 왔고,
잔인한 폴포트에 의해 학살된 결백한 사람들이며,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를 세울만한 돈이
없어 기부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우측 사진의 총을 든 젊은 군인은 학살에 참여 했던 크메르루즈 군인이며, 이 군인이 훗날 늙은
모습을 대비하여 게시 하였다. 늙은 노병은 말이 없었다.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는 사진자료를 벽보에 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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