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사진이야기

토목기술사인 사진작가 다람이 인생3막에 농부가 되어 직접생산한 포도로 정성드려 빚은 열정과 낭만의 와인 그리고 사진이야기

Achimmaru winery

Portfolio of my life/산행일기______

계룡산_갑사로 가는 길

daram93 2006. 11. 26. 14:26

 

지난 달 대전에 사는 친구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11월에 계룡산 산행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계룡산 등산로를 인터넷으로 탐색하던 중 "갑사"를 발견하였다. 불현듯 "갑사로 가는 길"이

떠 올랐다.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상보 에세이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며 갑사로 가는 길을 걸어보고 싶어 졌다.

이 수필의 배경은 함박눈이 소록히 쌓여 있는 한 겨울풍경이다. 지금은 늦은 가을이지만 그래도 갑사로

가는 길엔 잔잔한 서정이 넘쳐 날 것만 같은 기대가 쌓인다.

 

그래서, 오늘은  "갑사로 가는 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수필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고자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2006년11월 마지막 주말인 25일이다. 

 

 

 

아침부터 길이 막히는 서해안 고속도로로 들어서 평택에서 경부고속도로 갈아타고, 다시 논산천안간

고속도로를 달려서 정안IC에서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따라가니 갑사방향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를

따라 계룡면을 돌아서니 계룡저수지가 나왔다. 한적하고 조용한 저수지에는 푸른하늘이 거울처럼 비치

었다.

 

 

  

계룡산 산행코스는 갑사코스, 동학사코스, 신원사코스가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는 동학사

코스이다. 오래 전이지만 동학사로 올랐던 기억이 있고 갑사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이번에는 갑사코스를

선택했다. 위 안내도 사진을 클릭하면 큰사진으로 볼수 있으며 산행코스를 확인할 수 있다.

 

갑사로 가는 길 입구에 계룡산 8경에 대한 안내도가 그림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계룡8경은 천왕봉 일출,

삼불봉 설화, 연천봉 낙조, 관운봉 한운, 동학사계곡의 신록, 갑사계곡 단풍, 은선폭포 운무, 남매탑 명월

이다. 

 

 

   

갑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입구로 들어서니 귀목대신이라는 커다란 괴목 있고, 앞에는 제단이 있었다.

나무는 이미 죽은지 오래된 것 같아 보였으나 영험이 서려 있는 듯 위엄이 있다.

 

산입구에 노점상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구은 밤과 은행을 팔고 있다. 우리

일행도 밤 한봉지를 샀으나 상한 것이 많고 맛이 떨떠름 했다. 이왕이면 좋은 밤을 팔았으면 하는 바램

이다. 

 

 

 

주차장에서 갑사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채 가을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좌우측의 굵고 큰 나무는 가지들이 서로 맞다아 엉켜 있어 여름에 잎이 우거지면 터널이 될 것 같

다는 생각을하며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매표를 하고 조금 오르니 길가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탐스런 빛깔에 한입 베어 물고 싶

은 충동이 일었다. 아무도 수확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갑사로 가는 길에 마지막 단풍이 햇살에 투영되어 불붙어 타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으

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단풍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럴수록 더욱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며

칠 남지 않은 홍엽은 세월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겨울을 맞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피를 토하듯

몸부림치는 너의 모습은 장열했다고 전해 주마.

 

 

 

큰 고목들 사이로 평탄한 길을  조금 오르니 사천왕문이 나왔다. 어느 사찰이나 사찰을 들어가는 문이

있다. 사찰의 문은 부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한다. 대부분의 절은 일주문, 사천왕문, 해탈문

또는 불이문 이렇게 세개가 있다고 한다.

 

첫번째 문은 절에 들어가기 전에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는 일주문이고

두번째 문은 네명의 수호신인 사천왕이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으므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불심이

          없는 자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천왕문이다.

세번째 문은 해탈로 이르는 문으로써 부처님의 땅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잠시 사천왕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자. 위 사진에서 왼쪽부터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지국천왕

이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자신의 위덕으로써 만물이 태어 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

왕이다. 오른손은 용을 잡고 왼손은 용의 여의주를 들고 있다. 구반다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잡어 악안으로 불리는데, 이는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거나 눈을 크

게 부릅뜬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왼손에는 보탑과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고 용

과 비사사를 거느리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비사문천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고, 왼손에

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안민의 신으로서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

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한 천왕이다.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 바닥에는 보석을 올려 놓고 있으며 건달

바를 거느리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갑사로 들어섰다. 산사는 조용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들리기로 하고  삼

불봉으로 길을 재촉했다. 

 

 

 

갑사를 막 돌아서니 두갈래 길이 나왔다. 연천봉, 관음봉 방향과 금잔디고개, 용문폭포 방향이다. 우리

는 예정대로 금잔디고개로 올라섰다. 이 곳의 이정표는 현재위치와 산행코스를 알려주는 약도가 붙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난번 삼악산에서 길을 잃어 낭패를

보았던 생각을 하면 아주 친절한 일이다.  

  

 

위 사진은 용문폭포이다. 날이 가물어 계곡이 말라 물이 흐르지 않는다. 물길에 낙엽만이 쌓여 있어

처량한 느낌이다. 다시 하~얀 물줄기가 폭포의 시원함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폭포 아래

바위에는 "八曲 龍門瀑"이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등산로는 잘 정비가 되어 있어 오르기가 수월하였고 계곡과 능선들의 풍경이 아기자기하게 느껴져

닭과 용의 형국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룡산의 이름에 관한 유래는 조선조 초기에 이태조가 신도안(계룡시 남선면 일대)에 도읍을 정하려

고 이 지역을 답사하였을 당시 동행한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일컬었는데, 여기서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금잔디고개로 올라서니 이정표가 이곳이 금잔디 고개임을 알려준다. 어째서 금잔디 고개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금잔디는 한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에 비해 흡연금지라는 글자가 턱없

이 커 보인다. 적발되면 벌금이 20만원이라고 경고 문구가 붙어 있다.

 

여기서,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일행이 김치를 꺼내며 산에 김치까지 싸 간다고 핀잔을 들

으며 가져온 김치라고 사연을 이야기 한다. 김밥만 먹으면 몰라도 라면을 먹으려면 김치는 필수로 따라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잘 가져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김치는 며칠 전에 담근 김장김치

여서 너무 맛 있었다. 젓갈과 굴이 들어가서 그런지 감칠 맛이 돌았다. 핀잔들으며 가져 왔지만 맛있는

점심을 먹게 해 주어서 고마운 생각이다.  참말루 고마워 유~~      

 

 

 

금잔디 고개에서 이정표를 들여다보니 삼불봉으로 바로가는 길은 없었다. 남매바위를 가다가 삼불봉을

올라가야 했다. 이정표 약도대로 삼불봉을 가려면 같은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정표에는 없지만 능선을 타고 산불봉으로 향했다. 

 

 

 

산불봉을 오르는 능선에서 바라 본 계룡면 저수지 풍경이다. 계룡산 자락은 바위가 듬성듬성 솟아 아기

자기한 풍경이다.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이 나란히 서 있다. 관음봉은 산의 모습이 후덕하고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님

같다하여 관음봉이라 부른다. 문필봉은 봉우리 형상이 네 자루의 붓을 세워 놓은 형상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연천봉은 봉우리가 하늘에 이어졌다하여 연천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진에서 제일 우측에 피라밋 모양의 봉우리가 연천봉(738.7m)이고 가운데 쌍봉우리처럼 보이는 것이

문필봉(756m)이며, 그 좌측에 약간 둥근모양의 봉우리가 관음봉(816m)이다.

 

 

 

금잔디고개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계속 능선을 따라 가면

관음봉으로 가는 길이고 남매탑 방향으로 내려서면 삼불봉이다.

 

 

삼불봉은 동학사에서 올려다 보면 마치 세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 삼불봉(775m)이라 부른다고 한다.

삼불봉의 정상에 서면 동학사와 더불어 동학사계곡, 갑사계곡이 내려다 보이며 관음봉, 연천봉, 쌀개봉

천황봉이 보인다. 과연 장관이다.

 

  

삼불봉 정상에는 삼불봉 설화가 그려져 있는 안내 간판이 있으며, 신록이 피어나는 동학사 계곡과 단풍

이 붉게 타오르는 갑사계곡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게 한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삽불봉 사계의

조망은 언제나 아름다우며 특히 설화가 핀 계룡산의 풍광이 백미로써 이를 계룡산의 제2경이라 한다.

 

위 사진은 삼불봉 풍경이고 그 뒤로 대전시가 멀리 내려다 보인다. 눈 내리는 겨울에 다시 들러 이 비경

을 꼭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삼불봉을 내려서면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고고한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 

 

  

 

남매탑로 내려오니 커다란 바위 앞에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남매탑 중건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944년 봄 도굴범에 의해 회손된 남매탑을 대전시 효동에 사는 김선용씨가 사재를 털어 중수재건 했다

는 내용이다.

 

남매탑 주변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돌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거북돌은 인위적으로 조각한 듯

한데 솜씨가 매우 거칠어 보였다.  어느 중년의 여인은 남매탑을 향해 기도를 한다. 신심이 깊어 보인

다. 부디 소원이 이루어지길 같이 빌어 주었다.

 

 

남매탑은 청량사지 5층석탑과 7층석탑으로써 나란히 서 있다.  청량사지는 "淸凉寺" 라는 글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의 절터라고 한다. 이 탑들은 백제식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1950년대에 무너진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 탑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며, 이상보씨의 수필 "갑사로 가는 길"에 이 전설의 내용이 자세

히 담겨져 있다. 이미 학창시설 국어책에서 본 기억이 있을 것이나 이 전설속에 담겨져 있는 인간성 회복

을 위한 삶의 메시지가 가슴에 닿아 다시 한번 새겨보고자 한다. 

 

 

갑사로 가는 길 (이상보)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

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觀光)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

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

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

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姿態)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우리들은, 마치 북국(北國)의 설산

(雪山)이라도 찾아간 듯한 아취(雅趣)에 흠씬 젖는다. 원근(遠近)을 분간(分揀)할 수 없이 흐릿한 설경

(雪景)을 뒤돌아보며, 정상(頂上)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一字)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鷄鳴精舍)가 있

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 가에서는 남매탑(男妹塔)이 눈을 맞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거금(距今) 천 사백여 년 전, 신라(新羅) 선덕 여왕(善德女王) 원년(元年)인데, 당승(唐僧) 상원 대

사(上原大師)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起居)하며 수도(修道)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天地)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大師)는 죽음을 각오(覺悟)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念佛)에만 전심

(專心)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呻吟)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

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여 사방을 분간(分揀)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

이 한 처녀(處女)를 물어다 놓고 가버렸다. 대사는 정성(精誠)을 다하여, 기절(氣絶)한 처녀를 회생(回

生)시키니, 바로 경상도(慶尙道) 상주읍(尙州邑)에 사는 김 화공(金化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

(處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前後事)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佛心)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淸淨)한 도덕(道德)

과 온화(溫和)하고 준수(俊秀)한 풍모(風貌)에 연모(戀慕)의 정(情)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

로 떠나 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夫婦)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哀願)하지 않는가? 김 화공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救援)해 준 상원 스님이 생명(生命)의 은인(恩人)이므로, 그 음덕(陰德)에 보

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와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義男妹)의 인연(因緣)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

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男妹)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佛道)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

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男妹塔)이요, 상주(尙州)에도 또한 이와 똑 같

은 탑(塔)이 세워졌다고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男妹)의 지순(至純)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塔身)에 손을 얹으니

천 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熱氣)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大德)의 부동심(不動心)과, 백설(白雪)인 양 순결(純潔)한 처자의 발원력

(發願力), 그리고 비록 금수(禽獸)라 할지라도 결초심(結草心)을 잃지 않은 산중 호걸(山中豪傑)의 기연

(機緣)이 한데 조화(調和)를 이루어, 지나는 등산객(登山客)의 심금(心琴)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몇일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하나,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지 오래여서, 다시 산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남매탑 전설의 두 주인공을 뒤로 남기고 다시 금잔디 고개로 되돌아 하산을 시작했다. 갑사계곡의 정취

와 풍경 그리고 두남매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늦가을의 사색에 푹 빠지게 한다.  

 

   

 

갑사로 들어 섰다. 제일 먼저 반겨 주는 것은 감나무 였다. 여기저기 감나무에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아무도 열매를 따는 사람이 없어 농익은 감은 저절로 떨어져 질퍽거렸다. 산사의 넉넉함을 보

여 주는 풍경이다.  

 

 

갑사는 420년 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창건하였고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天佛殿과 眞光明殿 大光

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

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國中大刹로 크게 번창되었다고 한다.


 

   

 

좌측 사진은 갑사 동종이다. 이 종은 1584년 조선선조 17년에 만든 종이며 몸체에 만든시기를 표시한

명문이 있어 우리나라 종의 변천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甲士寺"라는 표기가 있어 절의 이름

이 지금과 달랐던 것도 알 수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가운데 사진은 갑사 표충원이다. 표충원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활약한 서산

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오른쪽 비는 의승장 영규대사기적비이다.

 

 

 

 

천년 고찰의 산사에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지나는 길손은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을 앵글에 담는다.  

 

 

붉은 단풍 넘어로 사찰의 기와가 가지런히 보인다.

 

 

 

하루 해는 감나무 넘어로 뉘역뉘역 저물고 있다. 갈길 바쁜 나그네는 서둘러 산을 내려 가고 산사의

풍경에 매료된 필자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되돌아 보며 산을 내려 왔다.

 

계룡산의 비경과 남매탑에 얽힌 사연은 산행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고 오랜 친구와 함께한 산행은

산의 높이 많큼이나 우정을 돈독히 채워 주었다.